강단 있게 도전하고 깨부순, '러블리' 박보영 따뜻함과 신념 지닌 명화 역 연기 변신 "대선배 이병헌과 맞대응 연기 무서워" "러블리 이미지 탈피…말투·톤 신경 써"

2023년 08월 06일(일) 13:12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우리가 아는 박보영은 없다. 앙증맞게 작은 체구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러블리한 매력을 내뿜던 박보영을 기대했다면 낯설 것이다. 따뜻하면서 심지가 곧고, 부조리에 쉽게 타협하지 않는 '명화'를 입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하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고 허우적대지 않는다. 스타일을 바꿨지만 자신에게 어울리게 적당히 리폼한 모습이다. "낯설지만 거부감 없게 표현하고 싶었다"는 그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순간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박보영이 출연한 전작들과 확연히 결이 다른 작품이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돼버린 서울에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온통 잿빛이다. 살기 위해 황궁 아파트를 찾아오는 외부인과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사수하려는 입주민의 싸움, 왕처럼 군림하는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은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을 유발한다.
"제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느낌을 내고 싶어서 선택한 작품이에요. 예전에는 이미지가 국한된 것 같아서 속상했거든요. 말할 때도 애교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황궁 아파트 602호에 남편 민성(박서준)과 단둘이 사는 명화는 대지진 이후에도 차분하게 생존을 고민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인도 집에 들이고 서슴없이 먹을 것을 나눠줄 정도로 정도 많다. 희생 정신 가득한 간호사로서 신념을 잃지 않는다. 극한의 환경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강단 있게 소신을 밝히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명화를 보고 집단 행동에 반기를 드는 민폐 캐릭터라고 한다.
"민폐 캐릭터는 아니에요.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런 친구가 꼭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변화해가는 민성을 붙잡고 싶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신념까지 복합적인 마음이 있는 거죠.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이 필요해요. 그래서 전 끝까지 명화를 응원하고, 잘 그려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명화는 남들이 모두 '예스(yes)'를 외칠 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관객은 작품을 보는 내내 각 등장 인물들에 자신을 대입해 보게 될 텐데, 누구도 명화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박보영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게 재밌어서 이 작품을 했어요. 시나리오 보면서 3번 정도 멈췄거든요. '나는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민성이처럼 할까. 휩쓸리는 사람 중 한 사람일까' 고민했는데 진짜 잘 모르겠어요. 명화처럼 총대를 멜 수 있을까 되뇌었지만 정답을 찾지 못했어요."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모든 질문의 답을 내려준다. 시나리오를 보는 박보영에게도 큰 울림을 준 대사였다. 박보영은 담담하지만 여운을 주는 연기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엄태화 감독도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까지 고민한 부분이다.
"마지막 촬영 날 엔딩을 찍었거든요. 제가 그 대사에서 얻은 게 많은 만큼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스스로 다른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표현을 바꾸거나) 대사 없는 것도 해보고 많은 시도를 했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또 다른 산은 이병헌이었다. 영탁과 맞대응을 해야 하는 신은 걱정 거리였다. 대선배를 마주 보고 팽팽하게 연기하려니 주눅 드는 기분이었다. 눈치챈 이병헌이 '그 부분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신경 써서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감독님이 만날 때마다 괜찮냐고 물어보실 정도였어요. 그래서 머리 뻗치고 (꾀죄죄한) 영탁의 사진을 제게 주시면서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해놓고 갈치 보듯이 하라고 하셨어요. 왜 갈치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적응하라고 하신 거죠. '난 할 수 있다. 난 무섭지 않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니 사진은 익숙해졌는데 실제로 마주했더니 너무 무섭더라고요. 눈빛이 확실히 무서웠어요."(웃음)
명화를 연기하며 드문 드문 박보영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도 고민이었다. 특유의 콧소리와 높은 목소리 톤이 명화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신경 쓰인 것이다. "소리를 지르거나 숨을 때 튀어나오더라고요. 민성에게 '들어와'라고 하는데, 제가 듣기에는 '들어왕'이라고 들렸어요. 감독님은 그렇게까지 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는 크게 들렸던 거죠.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후시 녹음 때 다시 했어요."
박보영은 자기 연기엔 부족한 게 더 크게 보인다고 했지만, 작품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대단했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는 점이 크게 다가온다는 얘기였다.
"너무 기대고 싶은 이병헌 선배님과 함께 작품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대작이 제 필모그래피에 들어왔다는 게 든든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굵은 글씨체로 남아있을 것 같아요."